[역경의 열매] 김형민 (3) 유학 중에도 하루 7시간이상 기도… 전도 또 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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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1-26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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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진학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보금자리를 옮겼다. 오전에는 공부, 남는 시간에는 파출부 생활을 했다. 내가 일하던 곳은 샌프란시스코의 부촌이었다. 집에 가면 항상 멋진 옷을 입은 키가 큰 백인 여주인을 볼 수 있었다. 작은 키에 구세군에서 구입한 1달러도 안 되는 남루한 차림이었지만 나는 조금도 기죽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정체성은 단순히 파출부가 아닌,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였기 때문이다.

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늘 복음 전할 생각만 했다. 쿠키 가게에서 일할 때의 일이다. 취직한 가게에 쿠키를 드시는 예수님 그림이 있어서, 그림을 떼어내고 소중히 간직하던 성화로 교체해 놓았다. 예상대로 주인에게 야단을 맞고 쫓겨날 뻔했지만, 화를 내는 주인에게 나는 살아계신 예수님을 담대히 전했다. 그리고 내가 매상을 올리면 예수님을 믿겠느냐고 물었다. 의외로 주인은 흔쾌히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가게 주인을 전도하기 위해 가게 문을 닫는 밤 8시를 훌쩍 넘겨 밤 11시까지 주인 몰래 과자를 팔았다. 예수 믿는 사람이 들어오니 확실히 다르다면서 좋아하던 주인은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교회도 나가고, 여전도회장까지 맡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유학생활이었다. 공부와 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느라 몸은 늘 지쳐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기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매일 밤 대학원 뒤 동산에 올라가 새벽 두세 시가 넘도록 기도했다. 하루에 7시간 이상 기도하는 것이 생활화되었다. 이렇게 몇 년 동안 기도를 지속하다 보니, 그 지역에서 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어느 장로교회에서 집회를 맡게 되었고, 그날 우연히 집회에 참석했던 한미라디오방송 PD는 큰 은혜를 받았다면서 덜컥 나를 상담프로의 진행자로 추천하였다. 파출부와 아르바이트 생활의 고달픔을 이기기 위해 날마다 철야기도를 했던 내게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쓰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기도생활은 기숙사비가 떨어져서 쫓겨나게 되었을 때 최고조에 이르렀다. 하나님께서 기도해야 한다는 감동을 주시면 언제 어디서든 바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어느 날에는 학생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길에서 그런 감동을 주셔서 바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많은 미국 학생들이 기도하는 내 주변에 동그랗게 모여 들었다.

“What are you doing here?”

여기서 뭐하냐고 누군가가 큰소리로 물었다. 나는 당장에 눈을 뜨고서 “보면 모르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다급한 기도였기 때문에, 그냥 엎드려 있었다.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기도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 줄 믿고 지켰다.

저녁에 예배드리러 교회에 갔더니 한 집사님이 봉투를 건네는데, 정확히 기숙사비만큼 들어 있었다. 교회 전도사님의 병원비로 쓰려고 했는데, 그분이 이미 퇴원을 해서 어떻게 할까 기도하던 중에 내게 갖다 주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그 음성을 듣고 “주님, 그분은 제가 도와줘야 할 만큼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을 텐데요?”라고 되물었지만, 계속 그런 마음을 주셔서 순종했다고 했다.

오래 전 학창시절의 이 간증을 듣고, 개척시절 교회 학생들은 개인용 비닐돗자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자신이 다니는 캠퍼스에서 중보기도를 했다. 학생들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여름방학 내내 수도권의 대학을 돌며 ‘불타는 돗자리’ 기도회를 담대하게 해냈다. 캠퍼스 안에서 돗자리를 깔고 그 학교의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불타는 돗자리 정신은 낮춤, 순종, 담대함으로 대표되는 대학연합교회 리더십의 기준이 되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