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형민 (6) ‘대학연합교회’ 창대함의 첫발은 40일 돗자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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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1-26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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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귀국한 후 얼마가 지난 뒤인 2000년 서울시내 K대학 교수 신우회의 요청으로 학교 교목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예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교수와 학생들의 헌신으로 날로 예배 참석자 수가 늘어갔다. 하지만 내게는 더 큰 꿈이 있었다. 하나님께 서원했던 전 세계 열방으로 나아갈 젊은이들을 육성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대학 캠퍼스에 돗자리를 깔고 40일 동안 교수 세 분과 함께 기도를 시작했다. 40일 기도 끝에 하나님으로부터 ‘학교 총장을 찾아가라’는 기도 응답을 받았지만 그저 막막할 따름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거듭 요청하자 마침내 총장실의 문이 열렸다. 초면이지만 주님께서 주신 담대함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물론 주님을 영접하지는 못했지만, “다음에 다시 와도 될까요?”라는 말에 총장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얼마 안 있어 총학생회가 등록금 투쟁에 돌입하면서 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 때 머리 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이 바로 총장님을 다시 만나 전도할 때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총장님이 피신해 있던 도서관장실을 찾아갔다. 그리고는 작은 오케스트라 연주와 함께 복음성가를 불러 드렸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찬양을 듣자 총장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때다 싶어서 복음을 전하자 총장님은 곧바로 예수님을 영접했다. 이후 총장님은 나와 우리 교회의 절대적 지지자로 바뀌었다.

하지만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빈 강의실을 전전하는 열린 예배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강의실에서 일주일에 한번 드리는 목요예배는 너무 많은 제약을 갖고 있었다. 무거운 악기나 음향시설을 매번 옮겨 다니는 것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밀려오는 학생들을 양육하기 위한 안정된 공간이 절실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절차를 밟아 비기독교 학교 내에 교회를 세운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기독교인들의 반대가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그저 앉아서 때를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것이 확실한 주님의 뜻이라면 실행에 옮겨야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모한 일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캠퍼스 안에 폭 3m, 길이 9m 크기의 컨테이너 박스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교 신자였던 총무처 직원이 출동했다. “김 선교사, 지금 뭐하는 거요? 여기에 당신 아방궁 짓는 거요, 뭐요. 당장 철거하도록 하시오! 그러지 않으면 강제로 철거하겠소!”

단호한 명령을 내리고 승용차에 올라타는 그를 쫓아간 나는 무조건 차문 사이로 황급히 몸을 넣었다. 깜짝 놀란 그는 “지금 뭐하는 겁니까?”라고 소리쳤다. 그를 그냥 보내면 절대로 학교 안에 교회를 세울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나는 “갈 때 가더라도 기도 한 번만 받고 가세요”라며 그를 붙잡았다. 비에 흠뻑 젖어 생쥐 꼴이 된 나는 눈물로 기도를 했다. 한동안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는 너무 측은해 보였던지 눈을 감아줬다.

그와 헤어진 뒤 두어 시간 지났을까, 총무처로부터 연락이 왔다. 컨테이너 박스를 철거하지 말고 그 자리에 두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너무도 쉽게 그리고 한 순간에 모든 것들이 해결됐다. 할렐루야!

학생과 교수들은 부둥켜안고 울면서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컨테이너 깡통교회이지만, K대 개교 50년 만에 처음으로 학교 안에 교회가 세워졌다. 이 소식을 들은 교직원 신우회에서도 “개교 이래 수십년 동안 교회 설립을 위해 기도해왔는데, 마침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축하해 주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