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형민 (7) 학생들 헌신으로 깡통교회에서 성수성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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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작성일
2021-01-26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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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적으로 캠퍼스 내에 컨테이너 깡통교회를 세운 후 70명 넘는 학생들이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큰 부흥이 일어났다. 하지만 학내 문제와 비신자 교직원들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혀 또 다시 철거명령을 받는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다급한 나머지 컨테이너 교회를 학교 내 어디로든 옮기기로 했다. 속수무책으로 교회가 철거당하면 학교 안에 다시 성전을 세우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2002년 4월 5일 학교 안에 있는 산중턱 숲속으로 컨테이너를 옮기는 무모한 작업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 작업을 하던 중 예기치 못한 불상사가 일어났다. 기울어진 지형을 다듬기 위해 들여 놓은 포크레인이 나무 몇 그루를 손상시킨 것이다. 결국 교회를 지키겠다는 계획은 무산되고 오히려 더 좋지 못한 결과가 나왔다. 교회에 출석하던 교수들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다가 현장에서 작업을 지휘하던 두 교수가 고발당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나와 두 교수는 그해 고난주간에 형사 사건으로 법정에 섰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두지 않았다. 변호사가 아닌 검사의 이의제기로 집행유예를 받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어쨌든 우리는 한 장애인 단체에 컨테이너를 기증하고 정든 캠퍼스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 후 더 많은 은혜로운 일들이 일어났다.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았던 두 교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헌신했고, 그 중 한 분은 1년 후 서울시에서 최고의 과학자에게 부여하는 120억원 상당의 프로젝트를 맡았다.

캠퍼스에서 철수한 후 나와 학생들은 몇 달간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예배를 드려야 했다. 때론 야외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는데, 성도들이 비를 맞아가며 예배드리는 모습은 정말 안쓰럽기 짝이 없었다. 학생들과 함께 이런 저런 일들을 하고 모금을 해 고생 끝에 학교 앞 상가에 40평 남짓한 성전을 얻었다. 입당 예배를 드린 후부터 교회는 폭발적으로 부흥돼 주일이면 자리를 못 잡은 교인들이 상가 밖에서 TV모니터를 통해 예배를 드려야 했다. 주님께서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거리에 나선 우리에게 더 좋은 것을 주신 것이다.

문제는 돈이었다. 교회 건물을 구하기 위해 수소문하다가 결국 성수역 근처 상가의 5, 6층을 찾아냈다. 마음에 들어 일단 계약부터 했지만 20억원을 구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학생들에게는 무조건 잘 해결될 것이라고 선포했지만 뾰족한 수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주일예배 때 학생들이 자원해서 50만원, 100만원씩 헌금 작정을 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 몇몇 의대생은 5000만원의 거금을 건축 헌금으로 작정했다.

물론 학생들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마음이 그저 이쁘기만 했다. 당시 의대와 간호대 학생들이 국가고시에 합격하면 은행에서 큰 돈을 대출해 주었는데 그것만 믿고 그들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작정을 했다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됐다. 달동네 출신인 의대생 김재열 형제는 당시 간절한 도움을 필요로 했던 가족들보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먼저 지켰다. 만류하는 내게 내놓았던 그의 고백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의사면허증은 제 것이 아닙니다. 저 자신도 제 것이 아니고요. 찢어지게 가난한 제가 의대를 무사히 마친 것도 기적이고, 의사고시에 합격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의 헌신을 필두로 헌신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학생들의 이러한 놀라운 헌신을 듣고 많은 분들이 거액을 쾌척했고 마침내 성수성전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컨테이너 깡통교회에서 시작된 대학연합교회의 성수성전 입당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는 어떤 헌신도 불사하겠다는 젊은이들을 통해 주님께서 이루신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정리=정수익 선임기자 sagu@kmib.co.kr